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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자료

제임스 스카스 게일 - 한국을 사랑한 캐나다 선교사

by allformission 2025. 4. 17.

한국을 사랑한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 (James Scarth Gale, 1863–1937)

 


 

1. 어린 시절과 선교사의 소명

게일은 1863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기독교적인 가정에서 자란 그는 젊은 시절부터 선교에 큰 관심을 가졌고, 토론토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장로교 선교사로 헌신합니다.

그는 1888년, 25세의 나이에 조선 땅에 발을 딛습니다. 당시 조선은 여전히 유교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였지만, 게일은 언어와 문화를 깊이 배우며 선교뿐 아니라 한국을 이해하려는 자세로 조선 사회에 다가갑니다.

 


 

2. 한글과 조선어에 대한 탁월한 이해

게일의 위대함은 단지 선교활동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국어를 깊이 연구하며, 당대 누구보다 조선의 언어와 문학을 잘 이해한 외국인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언어 업적:

  • 한영사전(1897) 편찬
  • 성경 번역 (신약 중심, 후에 공동 번역본 제작 참여)
  • 한국 속담 번역 및 소개
  • 한국 문학 작품 번역 (허균의 《홍길동전》을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

그는 조선어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서양에 알린 최초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습니다.

또한, 한국음악연구회를 조직하여 찬송가 개편에 기여했습니다


 

3. 문학과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

게일은 조선의 문화와 민속, 종교, 철학에도 큰 관심을 가졌고, 이를 서구에 소개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드물게 조선인들의 눈높이에서 조선을 기록한 인물로, 그의 글에는 선민의식이나 식민주의적 시선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주요 저작:

  • 《Korean Sketches》(1898)
  • 《Things Korean》(1908) – 한국 문화를 서양에 소개한 책
  • 《Korean Folk Tales》(1913) – 한국 전래동화 번역 및 정리

 


 

4. 선교사에서 문화사학자로

게일은 단순한 선교사 이상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자 많은 민속 자료를 수집하고, 역사적 가치를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기독교를 조선의 정서와 문맥 안에 전하고자 한 드문 선교사로, 강요보다 공감과 이해를 강조했습니다.

 


 

5. 은퇴와 마지막 생애

게일은 1927년 은퇴 후 캐나다로 돌아가, 조선에서의 기록과 자료들을 정리하며 한국 연구의 기초 자료를 남겼습니다.
그는 1937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언어, 문학, 신앙의 자취는 지금도 한국에 남아 있습니다.

 


 

역사적 평가

공헌설명
📘 언어학자 한영사전 편찬, 속담과 문학 번역을 통한 한국어 보급
📖 선교사 한국 정서에 맞춘 선교, 강요 없는 복음 전달
🧭 문화연구자 조선의 문화를 서구에 알리고 공정하게 기록
🌍 다리 역할 한국과 세계를 연결한 문화 사절이자 번역가

 

 


 

 마무리하며

게일 선교사는 조선을 단순한 선교지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국을 사랑했고, 이해하려 애썼고, 세상에 소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발자취는 오늘날에도 선교와 문화 교류, 그리고 언어 연구의 본보기로 남아 있습니다.

 

 

1889년 황해도 해주와 경상도 부산을 중심으로 전도 여행을 다녔고

1890년부터 서울의 예수교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참고로 이 학당은 훗날 교장이 된 게일의 발제에 의해 경신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1891년 초에 서상륜 등의 주선으로 존 로스 목사를 만났고 동년 8월 31일에는 토론토 YMCA 측의 자금 부족으로 인해 선교 지원이 중단되어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로 선교 단체를 옮겼다.

1892년에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소속으로 성서 번역에 참여해 마태복음, 에베소서 등 신약성서 일부를 번역했고 바로 다음 해에는 <천로역정>을 한국어로 번역해 발간했다.

1897년에 <한영사전>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에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에 돌아왔다.

1900년부터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회 간사를 역임하였으며 <춘향전>, <구운몽> 등을 영역하여 한국의 언어·풍습 등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1903년에는 황성YMCA를 창립했는데 이는 현재 한국YMCA연합회의 전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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