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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자료

백홍준: 조선 개신교의 뿌리를 내린 초기 전도사와 순교자

by allformission 2025. 4. 24.

백홍준: 조선 개신교의 뿌리를 내린 초기 전도사와 순교자

백홍준(白鴻俊, 1848~1893)은 조선 후기 개신교 전파의 핵심 인물로, 외국 선교사 의존적 역사 서술에서 간과되기 쉬운 **'조선인 최초의 전도사'*이자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의 삶은 서구 문명 수용과 전통 사회의 갈등, 신앙적 헌신과 정치적 박해가 교차하는 복잡한 시대적 맥락을 보여줍니다.

1. 역사적 배경: 개항기 의주의 특수성과 백홍준의 정체성

1.1 국경 도시 의주의 문화적 혼종성

의주(義州)는 압록강을 끼고 중국과 맞닿은 국경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19세기 중후반 이 지역 상인들은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서구 문물을 먼저 접했으며, 이는 백홍준이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의주 상인들은 서울 양반 사회에서 천시받던 중인(中人) 계층으로, 서구적 가치를 수용할 경제적·문화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1.2 백홍준의 가족 배경과 성장 과정

백홍준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대대로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했습니다. 유년 시절부터 한학(漢學)을 익혔으며, 특히 언어에 재능을 보여 중국어와 만주어에도 능통했습니다. 10대 후반부터 부친을 따라 무역 활동에 참여하며 국경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했고, 이는 그의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3 백홍준의 이중적 정체성

상인 중국과의 무역으로 경제적 기반 마련
학자 한학(漢學)과 서구 과학 지식 병행 학습
신자 1876년 이응찬·이성하와 함께 세례(조선인 2번째)
번역가 로스와 함께 한글 성경 번역 주도

이러한 다층적 정체성은 그가 전통 유교 사회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유리한 위치에 있게 했습니다. 1882년 《누가복음》·《요한복음》 번역 시, 그는 한문 성경을 의주 토박이 말로 풀어내며 현지인들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2. 선교 활동의 다각적 접근

2.1 존 로스와의 만남과 신앙의 시작

1874년, 백홍준은 중국 심양(瀋陽)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를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26세였던 그는 서양 의학과 과학 지식에 먼저 매료되었으나, 점차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2년간의 교육과 교류 끝에 1876년, 이응찬, 이성하와 함께 세례를 받아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 개신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2.2 성경 번역과 출판 전략

백홍준은 성경 반포를 위해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1. 노끈 성경: 종이를 말아 노끈으로 위장해 국경 통과
  2. 야간 제책: 밤중에 노끈 풀어 책 제본
  3. 유통 경로: 의주→강계→삭주 순회 전도 시 보급
  4. 비밀 표지: 전통 유교 서적처럼 위장한 특수 제본

이 전략 덕분에 1887년 《예수셩교젼서》(신약전서)가 출간되기 전까지 10년간 1,000권 이상의 복음서가 유통되었습니다.

2.3 교회 설립과 교육 시스템

그의 사역은 단순 전도를 넘어 체계적인 공동체 건설로 이어졌습니다:

  • 1883년 의주읍교회 설립: 서울 새문안교회(1887)보다 4년 앞선 조선 최초 교회
  • 제자 양성 시스템:
    • 한석진(초대 한국인 목사)
    • 김관근(사위, 후임 목사)
    • 양전백·김진근(평북 지역 교회 지도자)
  • 교육 사역: 야학을 통한 문맹 퇴치와 여성 교육

2.4 선교 방법론의 혁신

백홍준은 조선의 전통문화를 존중하는 접근법을 취했습니다:

  • 전통문화 활용: 판소리 형식의 복음 전달
  • 동족 소통: 조선인들에게 직접 전도하는 자생적 선교
  • 통합적 접근: 지역사회의 필요(의료, 교육)와 복음 선포 병행
  • 자립 교회: 외국 선교사 의존도를 낮추고 조선인 중심 교회 운영
  •  

2.5 의료 선교와 사회 활동

백홍준은 로스 선교사에게서 배운 기초 의료 지식을 활용해 간단한 치료와 약 처방을 통해 지역 주민들을 돕기도 했습니다. 특히 1886년 의주 지역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그는 교회를 임시 진료소로 활용하여 환자들을 치료하고 격리 조치를 취함으로써 지역사회에 기독교의 긍정적 이미지를 심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치유자'로서의 예수 이미지를 전파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3. 박해와 순교: 정치적 갈등의 사회학

3.1 체포 배경의 다층적 요인

요인 세부 내용
지역적 서북지방 세도가문과의 갈등
종교적 천주교 박해 선례 적용(1866년 병인박해)
정치적 외세 연계 의혹(로스·마펫 등과의 교류)
경제적 무역 독점권 위협(의주 상인층 기독교 유입)
문화적 유교적 예법 위반(남녀 혼석 예배)

1892년 평안감사 민병석의 체포령으로 투옥된 그는 2년간 고문을 견디다 1893년 옥중에서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정부가 개신교를 천주교와 동일시한 데서 비롯되었으나, 실제로는 지역 권력 구조 변화에 대한 우려가 더 컸습니다.

3.2 투옥과 순교 과정

1892년 평안감사 민병석의 체포령으로 투옥된 그는 2년간 고문을 견디다 1893년 옥중에서 사망했습니다. 투옥 기간 중에도 그는 감옥 안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의 옥중 일기는 현존하지 않지만, 동료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까지 신앙을 부인하라는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백홍준의 순교는 후대 한국 교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이 실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정부가 개신교를 천주교와 동일시한 데서 비롯되었으나, 실제로는 지역 권력 구조 변화에 대한 우려가 더 컸습니다.

3.3 순교의 영향과 신앙 공동체의 반응

백홍준의 순교는 오히려 조선 개신교 확산의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 순교자 숭배: 그의 이야기는 개신교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
  • 교회 성장: 의주 지역 교회는 박해 이후 오히려 급성장
  • 선교사 인식 변화: 외국 선교사들의 조선인 지도자 존중 증가
  • 국제적 관심: 그의 사망은 국제 선교단체의 조선 관심 증대

3.4 가족의 신앙 계승

백홍준의 순교 이후, 그의 가족은 심각한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신앙을 지켰으며, 특히 사위 김관근은 의주읍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를 계속 이끌었습니다. 백홍준의 아들 백신기는 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었으며, 그의 손자 백도진은 1930년대 항일 기독교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 역사적 재평가: '로스 번역본'에서 '백홍준 번역본'으로

최근 연구는 백홍준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4.1 번역 작업에서의 주도성

  • 언어 선택: 서북 방언 기반 대중적 표현
    • 예) "하나님" → "하느님"(현대어 '하나님'의 기원)
  • 문화 번역: 유교 용어 차용
    • "구원" → "성인의 도"(聖人之道)
    • "죄" → "허물"과 "죄" 병행 사용
    • "하늘 나라" → "하늘 나라"와 "천국" 병행 사용
  • 공동 작업 방식:
    1. 로스: 한문 성경 제공
    2. 백홍준: 구어체 해석
    3. 이응찬: 한글 필사

이 과정은 단순 번역이 아니라 **'문화적 재창조'**였으며, 1887년 완성본은 외국인 선교사 단독 번역보다 13년 앞선 성과였습니다.

4.2 백홍준의 신학적 특징

그의 번역과 설교에 나타난 신학적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유불선 종합적 접근: 유교의 도덕성, 불교의 자비, 선도의 영성을 기독교 해석에 통합
  2. 실천적 신앙 강조: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된다" 원칙 강조
  3. 민족적 메시아 사상: 예수를 조선의 구원자로 재해석
  4. 종말론적 희망: 고통받는 민중에게 종말론적 희망 제시

이러한 토착화된 신학은 후대 한국 교회의 독특한 신학적 특성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5. 현대적 함의: 다문화 사회의 선교 모델

백홍준의 사례는 오늘날 다음 질문을 던집니다:

5.1 문화 간 선교 전략 비교

구분 19세기 백홍준 21세기 디아스포라 선교
     
매개체 노끈 성경 디지털 성경 앱
언어 서북 방언 현지 슬랭·다국어
공동체 의주읍교회 온라인 셀 그룹
저항 관청 탄압 SNS 검열

5.2 종교와 정치의 경계에서

그의 순교는 "신앙의 자유 vs 국가 안보" 논쟁의 초기 사례로, 2023년 탈북민 선교사 북송 사태와 유사한 구조를 보입니다. 이는 종교적 실천이 정치적 이해와 충돌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를 예시합니다.

5.3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에 주는 교훈

백홍준의 토착화 방법론은 현대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 현장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1. 문화적 민감성: 현지 문화와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2. 현지인 주도성: 선교사 중심이 아닌 현지인 리더십 육성
  3. 상황화된 신학: 교리의 본질은 유지하되 표현을 현지 상황에 맞게 조정
  4. 통전적 접근: 영적 필요와 함께 사회적, 물질적 필요 충족

이는 특히 한국 교회가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지역에서 진행하는 선교 활동에 중요한 참고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6. 백홍준 유산의 현대적 계승

6.1 기념사업과 역사 복원

2005년부터 시작된 '백홍준 기념사업회'는 그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1. 학술 연구: 백홍준 관련 일차 자료 발굴 및 연구
  2. 기념관 건립: 의주읍교회 터에 백홍준 기념관 건립 추진
  3. 기념예배: 매년 4월 27일 '압록강 세례 기념일' 추모 예배
  4. 교육 자료: 주일학교와 신학교 교육용 자료 개발

6.2 북한 지역 교회 역사 복원 의미

백홍준의 사역지였던 의주는 현재 북한 지역으로, 그의 역사 복원은 남북한 교회 역사의 연속성과 통일 이후 북한 교회 재건의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그의 토착화된 신앙 모델은 향후 북한 선교에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잊혀진 뿌리에서 피어난 신앙

백홍준은 조선 토착 신앙인으로서 서구 선교사와의 협력보다 자생적 복음 전파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의 삶은 외부 문명 수용과 자문화 정체성 유지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한 근대 지식인의 전형이자, 오늘날 한국 교회가 되새겨야 할 **'신앙의 본질'**을 질문합니다. 2024년 현재 의주읍교회 터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매년 4월 27일 '압록강 세례 기념일'에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백홍준의 유산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직면한 다양한 도전—문화적 토착화, 선교적 정체성, 사회적 책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는 서구 선교사의 '조력자'가 아닌, 한국 교회 형성의 주체적 '개척자'로 재평가되어야 할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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